축제와 일상

그것이 기획납북인지 아니면 그저 기획탈북인지는 민변이 제기한 혐의를 토대로 법적 절차를 밟아 규명하면 될 일이다. 의혹이 제기된지 불과 하루만에 이렇게도 신속하게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것을 보면 이례적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민변과 검찰이 내밀한 공조를 통해 이미 말을 맞추고 각본을 다 짜놨다는 의구심이 든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과거 정권의 적폐청산이라는 측면과 판문점회담으로 북한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고조된 이 시국에 대통령의 친정인 민변이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정부가 민변에게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이번 기획탈북 내지 기획납북은 이번 정권의 입맛에 안성맞춤인 사안이란 것이다.

그 저변에 깔린 공조와 의도는 설령 그렇게 추측할 수 있을지라도 이번 사건의 본질을 덮을 순 없다.만약 국정원 주도의 선거대비용 기획탈북이라면 국정원은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는 마땅한 책임이 있다. 그 여파는 다시 한 번 적폐청산이라는 명목의 국정원 개혁의 후반전 신호탄이 될만큼 막강할 수 밖에 없다. 댓글공작 사건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을 수 없다. 추후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국정원의 기획탈북으로 밝혀지면 국정원 개혁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고, 그 고함을 동력으로 정권은 국정원을 수술대에 눕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국정원의 도덕성이 추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바로 국정원 자체가 자신이 수술대에 누워야하는 환자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기에 개혁을 자초한 꼴이 된다. 이번 사안에서 국정원의 책임이 어느정도냐에 따라서 국정원이 받게될 공격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정도의 강도냐를 떠나서 그 자체로 이미 국정원개혁론자들은 아주 유용하며 매우 든든한 또 하나의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이 사안이 정말 정치적 목적의 '기획탈북'으로 판명된다면? 국정원개혁반대론자들에게 치명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기획탈북'을 넘어 탈북자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와 강요가 동반된 '납치적 탈북'이라면? 국정원은 자신 스스로가 배를 가르고 매스를 기다리며 수술대에 눕는 꼴이 된다. 국정원개혁반대자들에게는 최악의 치명타가 될 것이다. 반면, 국정원개혁론자들은 최상의 시나리오를 쥐게된다.

사실 여기까지는 추측과 예측이 뒤섞인 잡변에 불과할지 모른다. 개혁을 하든 말든 국정원 스스로가 자초한 것에서 그 책임을 회피해선 안되며 또한 회피할 수도 없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 관심이 가는 것은 이런저런 정치적 이해와 그 파장이 아니라 이 사안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노심초사하며 벌벌 떨고 있을 탈북자,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부르짖는 탈북자 송환의 서슬퍼런 고함소리 그 한복판 어디에서도 이들의 의사를 담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누가 납치범인지 알 도리가 없다.

납치를 생각해본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야 할 것은 결국 당사자의 의사다. 당사자가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또한, 그것이 납치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또한 그들에 의사에 의한 것이니까. 유괴도 일종의 납치라면 납치일 것이다. 속이고 기만해서 의사와 반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유괴라고 한다면 말이다. 가정폭력으로 학대받고 고통받는 아이를 집에서 '구조'했을 때, 부모 곁에 머물고 싶어하는 아이의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동기를 명분으로 그 아이를 다시 그 가정으로 돌려보내자고 말한다면 그 말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학습된 폭력과 각인된 고통이 진정으로 끔찍한 것은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피해자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도망쳤다는 이유 다시 폭력의 이유가 되는 것이 두려워 역설적으로 그 폭력 안에 머물고자 한다. 결국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말하는 자들은 그런 폭력의 구조를 외면하고 학대를 묵인하고 방치하는 것 아닌가. 정말 끔찍하고 위험한 폭력은 그 피해당사자가 감히 신고와 탈출을 도모하지 못 할 정도로 위압적이다. 그런 상태에 처한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학대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 그것을 발견하고 꺼내줘야만 한다. 구조와 유괴는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 사안의 당사자들이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그들을 자신의 의사가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말하지 못하는 미숙한 어린아이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과연 판단력이 올바르게 발현될 수 있을만큼의 여유로운 상황일까?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앞으로의 인생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작금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다가올 운명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형국이 됐다. 나는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유괴한 것인지, 도대체 누가 유괴범인지 혼란스럽다. 나는 단지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미숙아가 아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해줘야하고 그들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고향으로의 귀환이든 대한민국에서의 삶의 지속이든. 그것만이 무엇이 구조인지 유괴인지 누가 유괴범이고 누가 구조원인지를 밝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의 상황은 그들을 납치하고 있다. 그들이 납치됐다며 돌려보내야 된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자들이 그들을 유괴하고 있다. 그들은 입이 막히고 발이 묶였다. 그들을 구조해야한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제부터 우리가 절차적 정당성을 그렇게 중시했는지. 절차적 정당성이 정말 중요하다면, 그것이 위반됐기에 그들이 북송되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면 나는 그런 말들을 하는 자들이 왜 북한의 절차적 정당성은 문제를 삼지 않는지 나는 아리송하기만하다. 나는 북한이 어떤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남침했는지, 어떤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연평도를 포격하고 철책을 넘어 지뢰를 설치했는지, 어떤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천안함을 격침시켰는지, 어떤 합의와 과정을 준수하며 수차례의 핵실험을 진행했던 것인지, 도대체 어떤 절차적 정당성으로 정권 차원에서 인민들을 굶기고 고문하고 학대하고 감시하며, 사찰하고 통제하는지 나는 도대체 어떤 정당성이 그것들을 정당하다고 말 할 수 있게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이번 사건에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르짖는 이들이 왜 그동안은 북한정권의 그 절차적 부당함에 대해 침묵했는지 알 길이 없다. 만일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북한은 대한민국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니 물타기하지 말고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자행한 절차적 부당함에 집중하라고 말한다면? 전자는 가정폭력과 학대범에 다름없고, 후자는 그것을 방기하고 방조하는 공범에 다름없다. 나는 민변이라는 단체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라는 정식이름을 가진 단체라고 알고 있는데 만일 이들이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며 탈북자들의 북송을 주장한다면 그들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의거하여 민주라는 단어를 단체이름에서 삭제해야 한다. 그들이 만약 그런 논리를 펼친다면 그들이 그토록 부정하고 증오하는 과거의 군사정권이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정확히 부합하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민주정권이기 때문이다. 민변이 언제부터 군사정권을 인정하고 용서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만 그들이 솔직해지길 바랄 뿐이다. 나는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데 도대체 어떤 절차적 정당성이 필요하다는 것인지가 알고 싶을 따름이다.

축제는 찬란하다. 거기서는 모두가 화려하게 빛난다. 옷장 깊숙히 보관해둔 좋은 옷을 꺼내 먼지를 탈탈 털어 입는다. 눈부신 조명 아래서 농담과 찬사와 감탄을 주고받으며 이 축제가 영원하리라는 환상에 전율하며 더욱 그 축제에 빠져든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축제는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일상의 일탈이 다름아닌 축제다. 축제는 잠시고 일상은 지속이다. 실상은 반짝이는 조명과 화려한 옷들과 윤기가 흐르는 음식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다. 실상은 일상에서 드러난다. 축축하고, 음침하고, 지루하고 피곤한 연속과 반복에서 실상은 발견된다.

세계의 인권기구들이 한목소리로 북한의 실상을 고발한다. 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강제노역과 성고문을 비롯한 각종 고문에 시달린다. 그곳에서 공개처형은 일상이다. 그러나 어디 정치범 수용소에서 뿐만인가. 수용소 담을 넘으면 빈곤과 굶주림이 도사린다. 감시와 통제는 북한 인민들의 일상 그 자체가 된지 오래다. 그것이 바로 북한의 실상이다. 그런데 축제의 분위기에 편승해 그들을 그 지옥같은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나는 이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들의 의사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의사를 들어주고 존중해야한다. 그건 분명하다. 그들은 미숙아가 아니니까. 그러나 설령 그것이 자명하다 할 지라도 가슴 속 한켠에 남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불쾌감과 불안감은 무엇인가. 그들이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정말 그들을 놓아줘야 하는지... 그들이 돌아갈 곳이 어떤 곳인지 그들 또한 모를리 없겠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한 그들이 처한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이 마음이 그저 한탄스럽기만 하다. 나는 다만 그들이 승리하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밤잠 설칠 일 없도록

박정희 정권 초 맺어진 한일협정은 분명 굴욕적인 면이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역사가 일제 치하에서 당한 고통에 상응하는 물질적 댓가가 지급되었느냐는 문제는 별개로 둔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그 협정에는 사과가 없었다. 사과는 테이블 위에 올려지지도 못했고 애초에 그 협정 자체의 목적에도 그다지 중요하게 논의되지 못한 안건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자행된 만행들은 정권 차원의 정치적 필요성 앞에서 묵살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굴욕적협정을 맺었다는 시민사회의 분노와 그에 말미암은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다.대학생들은 상여를 메고 곡을 하며 박정희 정권이 주창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뤘다. 바로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다. 이 저항은 박정희 정권이 출범 후 맞이하게 된 가장 큰 저항이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이 강경권위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박정희 정권에겐 치명적인 위기감을 초래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함과 맹점이 있을지라도 박정희 정권이 추구했던 정치적 필요성 자체가 무시될 수는 없다. 완벽한 협정은 없다. 한일협정은 분명 굴욕적이었지만 그 협정이 필요했던 동기와 그로인해 얻어낸 댓가,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구어낸 결과물은 마땅히 그에 응당한 이해와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김정은이 분단의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무르익는 평화의 분위기는 분명 어떤 뭉클함과 낙관으로 채워진 희망을 고무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낙관과 희망이 토가 쏠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증스러운 것은 무엇때문인가? 김정은은 대한민국 대통령과 마주앉아 이제 밤잠 설칠 일 없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 자신들이 벌인 행동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불안하게 하고 위협했는지를 뻔뻔스럽게도 웃으며 인정한 것이다. 모르겠다, 뒤에서도 아니고 마주앉은 그 앞에서 그렇게 웃으면서 말할 일인지. 종 잡을 수 없는 기습도발로 무수한 희생자가 나왔다. 우리는 얼마나 맞았던가. 무단침입으로 해상에서 두차례의 해전을 치뤘고, 자국의 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함선을 격침시켰다. 총 한번 못 쏴보고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국민이 차디찬 바다에 수장됐다. 민간인이 거주하는 섬을 폭격하고 군인을 비롯한 민간인이 사망했다. 섬은 불길에 휩싸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떨어질 지 모르는 포탄과 폭격이 내리꽂은 그 어마어마한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들이 살던 터전은 포탄의 상흔을 흉터로 간직하게 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봉합되지 않은 상처를 부여잡고 숨죽여 울었다. 그들은 철책을 넘어 목함지뢰를 설치했다. 그곳은 우리 군인들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반드시 거치는 지점이었고 그들 또한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군인은 그 지뢰로 인해 발목이 절단됐고 눈앞에서 전우의 몸이 공중분해되는 것을 평생의 기억으로 떠안게되었다. 김정은 통치의 정당성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김정은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그만큼 거슬러 올라가 확장되어야 한다. 칼기폭파와 버마테러 만행의 책임에서도 그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모든 만행에 아스러진 희생자와 그 가족의 고통은 아직까지도 지울 수 없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이다. 늘상 이런식이었다. 그들은 때리고 윽박질렀고 우리는 맞고 참았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실실 웃으면서 어떠한 사과도 없이 그저 '이제 안 때릴게'라며 말한 것이다. 그말을 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따라 웃었다. 모를 일이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 역겨운 오만과 무책임의 여유가 뒤범벅된 말에 분노를 억누르며 회담의 성공을 위해 지었던 웃음인지, 아니면 그 말 자체에 대한 흡족함과 역사적 장면을 연출해냈다는 성취감에 그저 그냥 웃었던 것인지.

우리가 그렇게 맞으면서도 참았던 것은 바보병신이어서가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 의지를 가지고 행한 인내였다는 것을 설명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히 설명되었는지 의문이다. 혹여 이런 의문이 지금의 단계에서는 너무나 성급한 것이며 추후에 반드시 관철될 것이라며 낙관을 유지하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좋다. 그것은 앞으로의 결과가 말해줄 것이기에 기다릴 수 있다. 그동안 해왔던 인내에 비해 앞으로 펼쳐질 상황들에 대한 인내는 그나마 더 분명하게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테니까 조금 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협상테이블에 그들의 만행에 대한 사과와 우리의 인내에 대한 그들의 책임있는 조치가 애초에 안건 자체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사과를 받아낼 의지 자체가 애초에 포기되었다면? '사과를 받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대의를 위해 억울하지만 꾸역꾸역 참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며 지나간 일을 왜 들추냐며 좋은게 좋은거니 다잊자'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러한 염려가 기우이기를 바란다. 당사자 쌍방이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협정이란 없다는 말이 모든 협정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또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진리를 함축하는 말이지만 그말이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비가오나 눈이오나 집회를 연다. 응어리진 고통과 한을 부여잡고 일제의 만행을 증언한다. 일제에 의해 위안부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어떤 필요와 목적에 의해서 행해졌을지라도, 어떤 시대적 상황이 고려될지라도 위안부라는 야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다. 만약 북한이 대한민국에 자행한 만행을 그저 '분단되어 있는 대치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비극' 정도로만 유야무야 어거지로 넘어가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또 다른 연평해전 할아버지 할머니를, 연평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천안함 할머니 할아버지를, 목함지뢰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리그 그 모두를 비롯한 수많은 사과받지 못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민족이 자행한 만행에 대해서 사과를 받지 못하고 넘어간 것에 대해서 굴욕이라 한다면 한민족이 한민족에게 자행한 만행은 도대체 얼마나 큰 만행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모든 살인과 살해가 반인륜적 속성이 내재되어있겠지만 존속살해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 할 수 있기에 통상의 살해와 따로 분류하여 더욱 엄중히 책임을 묻는다. 이것이 우리 법에도 반영되고 구현되는 정신이다. 북한의 만행에 대해서 사과받지 못한다면, 정말로 그런 굴욕적 남북협정이 체결된다면, 이번에는 상여를 메고 곡을 부르며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이 아니라 민족의 장례식을 치뤄야 될지도 모른다. 한민족이 한민족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 일관되게 침묵하는, 그저 민족을 정쟁의 수단으로 들먹이는 외눈박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진정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우리 사회에 있다면 말이다. 민족주의가 애당초 있을 수는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있더라도 민족을 위한다면서 그 민족을 죽이는 짓에 침묵하는 민족주의자를 원체 많이 봐와서인지 그런 일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애당초 '진심어린' 사과는 바라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바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진심을 증명하고 측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인정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면 된다. 그에 합당한 배상의 문제는 그 후의 문제다. 형식적일지라도 상관없다. 사과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정하고 사과하라' 딱 이것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정과 사과조차 일본과 북한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북한이 자행한 만행이 어떠한 측면에서 일제가 자행한 만행에 비해 '덜'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인정과 사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안부를 외면하는 일본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어질 협정이 사과할 의지, 사과를 받아낼 의지조차 없는 굴욕적 평화협정이라면 우리는 훗날 '평화로운 한반도'의 거리에서 천안함, 연평해전, 연평도, 목함지뢰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집회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광경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일리 없다.

김정은은 북한으로 관광 온 관광객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상자가 나오자 "그 어떤 말과 위로나 보상으로도 가실 수 없는 아픔을 준데 대해 깊이 속죄한다"고 했다. 김정은이 속죄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개연성이라고는 그저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일어났을 뿐인 단순 교통사고에 대해서도 그렇게 반응할 정도로 예민한 책임의식을 가졌다는데에 두 번 놀랐으며, 교통사고에도 그런 표현을 써가며 사죄했으면서 기습적이고 의도적인 군사도발로 자신들 그렇게 부르짖는 '우리민족'인 우리 국민을 죽인 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나 없고 웃으며 퉁치고 넘어가려는 대범함에 세 번 놀랐다. 그 교통사고의 사상자 중에 마오쩌둥의 친손자가 있었다느니, 중국 내 유력단체가 피해를 입었다느니는 중요하지 않다. 마오쩌둥 친손자든 외손자든 증손자든지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관광객에게도 책임감을 느끼며 '속죄'한다고 까지 말하면서 비겁한 기습도발로 무고한 민간인과 군인을 살해한 것에는 어떤 속죄도 없다는 것에 깊은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둥의 친손자라는 이유가 산화한 우리의 아들 딸과 아버지 어머니며 형제 자매가 받지 못한 속죄를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 못할 일이다. 정전상태의 적국을 타격한 것이 뭐가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으로서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 그 논리대로라면 정전이 종전으로 전환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북한은 마땅히 생존해있는 시대의 고통에 응분의 책임과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그럴까? 아니 애초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평화일까? 그들이 자신의 만행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평화에 얼마만큼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이제 정부의 역할이 막중하다.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며 실효가 있다. 그들에게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또 평화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도망갈 것이다. 그들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다.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사과 없는 평화란 한쪽이 철저하게 파멸해야지만 가능하다. 화해 없이 맞이한 평화는 재앙의 씨앗을 품고 있다. 어렵사리 문을 열고 그들을 테이블에 앉힌 것은 분명 성과다. 그러나 거기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얻어맞고 주머니만 털리고 나올지는 지켜볼 문제다. 부디 정부가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고 나오길 비란다. 가장 극악한 만행은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각인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인정없고 사과없는 만행만큼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고, 사과 없인 평화 없다는 분명한 압박을 가해야한다. 그들이 사과하지 않겠다면 그들의 뒷목을 잡아 끌고와서라도, 무릎 관절을 후려쳐서라도 그들을 현충탑 워령비에 무릎 꿇려야 한다. 이는 정부의 역할이며 이번 평화협정에서 비핵화보다도 중요한 문제다. 비핵화는 다시 핵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그들이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진실로 영원히 남을 것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아직도 밤잠을 설치며 맴돌고 있는 모든 이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게하는 유일한 길이다. 김정은이 했던 밤잠 설치지 않게 하겠다고 한 이 약속은 어쩌면 북한의 만행에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과 산화한 용사의 영령들에게 우리가 먼저 했어야 했던 약속일지 모른다.

결국 제재와 압박

트럼프와 김정은이라는 양극단에서 문재인이 적절한 중재자로서 역할한 부분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럼프가 여지껏 어떤 역대 미국 대통령보다 강경한 대북입장을 표명하는 대통령인 점은 문재인에게는 역설적이게도 행운으로 작용한 면이 있다. 한국의 상대가 트럼프 못지 않은 김정은인 점에서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트럼프가 온건한 입장으로 접근했다면, 혹은 그 전임 대통령과 같이 대북문제에 이정도의 열성으로 집중하지 않았다면 문재인이 아무리 채찍을 들었어도 북한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채찍을 들 마음이 있었는지도 불투명하겠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나타나는 외교적 감각은 확실히 노무현의 오류와 패착을 자신들이 스스로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는 집권 2년차의 외교성적표'만'으로는 이미 노무현 정부를 뛰어넘었다고 평가한다. 지금까지는. 하긴 노무현의 성적표가 워낙 마이너스 성적표라 문재인 정부가 어지간한 실책을 범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이러한 성과만 놓고 보더라도 노무현 성적표에 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트럼프와 문재인이 꽤나 좋은 케미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가 영리하게 북한을 이용하고 관리했다면, 문재인은 이러한 트럼프를 영리하게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맞을 위기에 처한 사람은 때릴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에게 일단 화해의 의사표시를 전하기 마련이다. 민망하기도 하고, 결과가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궁지에 몰릴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적어도 대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문재인과 트럼프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평창동계올림픽부터 지금의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가 결과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결국 대북문제에 있어서는 제재와 압박이 필수적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트럼프가 방한했을 때 '전쟁가고 평화오라'는 현수막을 내걸며 극렬하고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민망하고 부끄러운 극성을 떨어대던 자들은 정말 그말이 자신들의 진심이라면 트럼프에게 사과와 동시에 감사를 표해야 함이 마땅하다. 평화를 부르짖던 자들은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고 느껴야한다. 무엇이 평화를 가져다주는지를. 무엇이 실체적인 실재로서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제발 그들에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인간의 양심과 이성이란 것이 있기를 빈다. 그리고 아울러, 이러한 성과를 보고 이제 앞으로 장밋빛 로맨스만 펼쳐지리라 낙관하는 순진한 낙관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순진한 낙관론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속보로 북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정상회담이 백지화됐다고 해도 놀랄 것이 없다. 그들은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더 절실한 반응은 이제 곧 평화가 오리라는 순진한 낙관보다는 아직까지도 갈 길이 멀다는 경계와 의심을 풀지 않는 냉철함이다. 그러한 반응이 주류를 이룰 때 정부도 북한도 모두 적당한 긴장감으로 협상에 임할 수 있다. 김정은이 본인 입으로 한국 국민의 대북인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코 뒷통수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점을 문재인 정부도 모르지 않으리라 희망한다. 

그동안의 대북문제에 있어서 굴욕적이라 여겨지던 부분들이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에 얼마만큼의 개연성을 가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는 대북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철저히 전략적인 자세로 굴욕마저 감내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셈이 됐다. 정말 실제로도 그러했었길, 그리고 그러하길 소망한다.

트럼프는 일국의 대통령,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이다. 미치광이네 어쩌네 떠들고 호들갑 피우던 한국 언론과 일부 세력들은 트럼프에 대한 평가를 이번 기회에 재고해야한다. 이 현상이, 이 성과가 정말로 무엇이 근거가 되고 원인이 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지 무엇이 김정은을 협상테이블에 나오게 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분석하고 파악한 데이터야말로 향후 북한이라는 유사국가와 어떻게 협상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아주 유익한 지표가 된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귀중한 자산인 셈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을 때 그 사람이 밉고 원망스러우면 그 자리까지 폄하하고 만다.  대통령? 하, 그거 뭣도 아니네, 걔가 그걸 하는거 보면. 이런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밉고 원망스러워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람이 괜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이나, 트럼프나. 뭐 어쩌면 김정은도.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으로 본 문재인 정부의 인식

"메달권이 아니다"

기자간담회에서 이낙연 총리가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에 관해 입장을 발표하는 중에 한 말이란다. 이 발언에서 문재인 정부의 단일팀에 관한 시각과 이를 대하는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문재인 정부의 이러한 인식과 판단이야말로 이번 사태가 발생한 근원적인 배경이자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메달권이 아니기에 배려대상도 아니고, 고려대상도 아니란 말인가. 그렇기에 선수들은 언제든지 '희생과 헌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된단 말인가. 선수들에게 도대체 무슨 거부권이 주어졌단 말인가. 그들을 위한, 그들만의, 그들의 협상과 협의에서 선수진은 철저히 배제당했다. 이것은 폭거다. 이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폭압이다.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국무를 총괄하는 관리자인 국무총리의 이런 망측한 말 한 마디에 선수들이 그동안 경기장에서 수없이 흩뿌렸을 피와 땀은 증발해버렸다. 선수들의 꿈과 노력은 매장당했다.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와 선수를 대하는 관료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말로써 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될 명언이리라. 그들에게 있어서 선수들은 그저 메달을 따오는 기계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이 먼저다'를 그렇게 신나게 외쳐댔던 이 정부가 이러한 판단을 내릴수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에 사람이 있는가?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 나는 그 말이 휴전선 저 너머에까지 효력이 미치는 말인 줄은 차마 몰랐다. 너무나 평등한 나머지, 너무나 공정한 나머지, 너무나 정의로운 나머지 적국의 사정까지 굽어 살피시는 아량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재인 정부의 행테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옛날, 멸사봉공의 기치를 휘날리며 자국민을 고문했던,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괴상한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군사독재정권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인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그래, 적어도 한 가지는 다르다 할 수 있겠다. 웃으면서 뺨때리기. 뺨 맞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라, 뺨 때리는 사람의 표정이 바뀌기까지 40년이 걸렸다. 그렇게 그 시대와 그 시대의 모습들을 열렬히도 부정했던 당사자들이 주축을 이룬 정부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서글플 따름이다. 휴전 상태인 적국에게는 멱살을 잡힌 채로 질질 끌려다니는 주제에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자국민의 뺨을 휘갈기는지 그 뻔뻔함에 치가 떨릴 따름이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올림픽을 이용하지 말자는 낯 가지러운 말은 하지 않겠다. 애초에 올림픽만큼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벤트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것은 형용모순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경기장 안에서 뛰는 것은 관료가 아닌 선수라는 점이다. 정치는 경기장 밖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기까지가 정치의 영역이다. 경기장 안에는 선수가 있다. 경기장 안은 그들의 영역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다. 이번 사태에서 아이스하키팀 선수진이 도대체 무슨 존중을 받았는지 의문이다. 경기장 밖을 지키고 있어야할 정치가 경기장 안에 난입해 깽판을 치는 모습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란다. 정말 진심으로. 

홍준표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두고 "쇼를 참 잘하는 정부"라고 했을 때, 그 쇼도 제대로 못하는 그들의 알량한 처지를 비아냥거렸다지만, 적어도 이번 사태에서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쇼는 분명 소름돋을 만큼 형편없는 쇼였다. 쇼를 할 때에는 쇼를 보는 사람이 쇼인지 모르게 해야지 쇼를 잘한다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아이스하키팀을 방문해 활짝 웃으면서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과 뒤이어 단행된 조치들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스스로 그 전에 보여줬던 모습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쇼였는지를 자백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쇼는 낙제점이다. 들통나버린 것이다. '쇼뽕'이란 이렇게 무섭다. 취해도 단단히 취한 모양이다. 만약 문재인 정부가 정말 "쇼"에 의존해서 지금까지의 지지율을 유지해온 정부였다면 아마 이번 사태로 많은 지지층의 이탈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한가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지점이다. 거품이 꺼지면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제 슬슬 바닥이 보인다. 주권자는 현명하다.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내린다.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에 아직도 희망이 있는 이유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지켜야 할 것인지를 안다. 이토록 수준이 높다. 전환의 기류가 감지된다. 누가 보고 싶은 올림픽이어야 하는지를, 누가 가고 싶은 평창이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바란다.

한 인간의 자유, 즉 개인의 자유를 외면하고 짓밟는 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북쪽에 있는 유사국가가 국가가 아닌 이유이며, 국가라면 시급히 사라져야 할 국가인 이유인 동시에 대한민국이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국가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번 논란에 관해서 문재인 정부는 이런 물음에 대답해야할 책임이 있다.

"이게 나라냐."


아직도 남한산성에 갇혀있다

원작을 충실히 옮기려는 시도는 분명히 빛났다. 그러나 시도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순 없다. 원작에서 풍부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었던 여러 지점이 탈락되고 최명길과 김상헌만 덩그라니 남겨놓았다는 아쉬움도 금할 수 없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김훈이라는 작가가 가지는 탁월한 필치와 담백한 문체는 차치하더라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남한산성에 갇히기까지, 또 갇히고 나서의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접근에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반갑지만 아쉬울 것이고,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원작을 읽어야할 또 하나의 이유가 될만한 영화라 하겠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노라면, 민초들의 애환과 그것과는 너무나도 괴리되었던 조정의 무능하고 관념에 빠진 넋두리를 김훈이 덤덤하게 묘사해내가는 그 남한산성을 읽노라면, 뜨거운 분노, 냉소 가독한 자조, 깊은 회의와 이러한 모든 것들을 품은 회환이 몰려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그 엄혹한 겨울을 부정하고 또 다시 봄의 꽃을 움트게 하는 민초들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이 남한산성에 갇혔다.' 영화 포스터에 적힌 글귀다. 그렇다면 누가 조선을 남한산성에 가두었는가? 오랑캐 청나라가? 청태종이? 용골대가? 정명수가? 조선을 남한산성에 가둔건 최명길이요, 김상헌이며, 인조다. 남한산성에는 왕도, 신하도 없었다. 그곳에는 무능과 몰염치와 무책임, 현실을 외면한 이상과 끝끝내 현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가조자 하는 실체도 없는 관념, 얼어죽은지 오래인 체통과, 후안무치한 자기기만과 비겁한 변명만 득시글 거렸다. 적어도 왕과 신하들이 국가의 대소사를 논했던 그 조정이라는 데는 그러했다. 남한산성을 지킨 것은 누구이고 가둔 것은 누구인가? 그렇게 욕을 해대던 오랑캐에게 왕이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신하들이란 작자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누구하나 나라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책임있는 성찰을 했던 자가 있는가? 또 그 성찰이 직접 현실에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노력했던 자가 있는가? 

칼날이 목 앞을 겨눌 때 그제서야 왼쪽 목덜미를 대느냐, 오른쪽 목덜미를 대느냐의 한심한 논쟁으로 핏대를 세울 동안 죽어갔던 것은 또 누구인가? 칼날이 목에 들어와서야 목숨을 구걸했던 어리석음과 바로 눈앞에 있는 서슬퍼런 칼날조차도 보지 못하고 충동하는 객기뿐이 남한산성을 가득 채웠다. 남한산성에는 합리도, 이성도, 책임도, 현실도, 실리도, 실용도 없었다. 남한산성은 그 모든 것을 상실한 댓가인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상실한 그 자체였다.오십보백보요 도찐개찐이다. 망국에는 충신이 없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이 청의 신하임을 천명하고 목숨을 구걸해 살아남아 그 후에도 수년을 더 왕의 자리에 있었다. 그야말로 왕을 해처먹었다. 그 치욕과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서 인조는 어떻게 했는가? 자신의 그 알량하고 비루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되지도 않는 북벌론으로 자위하며, 국고를 허비하고 민생을 고달프게 하지 않았던가? 청의 발달된 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청나라를 배우자고 했던 그 지극한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인 아들 소현을 인조는 어떻게 대했는가? 그 절절한 자기반성과 성찰에서 토해냈던 소현에게 비루를 던지며 아비의 원수를 배우자고 하는 파렴치한 불효자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소현이라고 아비가 가진 그 상처를 어찌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진정 다시는 그런 참화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야말로 충심에서 우러나온 성토였을 것이다. 그런 소현을 아비인 인조는 어떻게 대했는가? 그것이 정녕 나라잃은 굴욕을 겪었던 왕의 모습인가? 그것이 책임있는 왕의 모습인가?

있지도 않는 헛된 망상과 관념에 사로잡혀 체통만 부르짖을 줄 알았던 그 지체높은 선비와 유생들, 처자식이 끌려가 유린당하든, 상투를 잡혀 흙구덩이에 구를지라도 체통을 차리고 싶었던 그 지체높은 선비와 유생들이 남한산성에 나라를 가두고, 백성을 굶겼다. 남한산성의 성벽에 인조의 목이 걸렸더라면, 망국의 지경에 이를 때까지 수수방관했던 그 간신들의 목이 걸렸더라면, 그 체통있으신 선비와 유생들의 목이 줄줄이 걸렸더라면, 조선이라는 소꿉놀이터가 그 전란에 아예 멸망당했더라면. 너무 극단적인 생각임을 알지만서도, 만일 그러했더라면 죄없는 선령한 민초들이, 억울한 민중들이, 단지 살고팠던 백성들이 덜 잃고 더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일 그러했더라면 진정 잠시 괴롭고 오래 이롭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묘한 기시감에 서늘했다. 친일, 친미, 친중, 반일, 반중, 반미. 이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똑같다. 최명길과 김상헌이 똑같은 작자들인 것처럼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는 현실이 없다. 그저 이상과 관념의 바다에 빠져 헤엄치면서 민중을 입에 들먹인다. 민중을 죽이는 자들이 민중을 들먹인다. 언제나 정의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들이 가장 열렬히 정의를 부르짖는 법이다. 아직도 남한산성에 갇혀있지는 않은지. 아직도 남한산성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제서야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이 그 또한 소용없는 의문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역사는 단지 말할 뿐이다. 무엇을 들을지는 우리의 몫이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섰을 때 날은 우중충했다. 날은 서늘했고 거무튀튀한 검붉은 하늘이 짙게 내리앉았다. 비가 올듯 하면서도 햇빛이 자취를 보였다 감췄다를 반복했다. 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오는 것은 아닌지...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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