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이지 않은 도덕지향주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주된 논지는 한국 사회는 도덕지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결코 도덕적인 혹은 도덕주의적인 사회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도덕'지향'적인 사회다. 저자는 저자가 스스로가 가지는 환경적 특수성에 기인하는 예리한 통찰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국과 가장 격렬한 충돌과 대립의 대상 중 하나인 일본 출신인 저자는 동시에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학업을 진행한 한국 유학생이기도하다. 그런 연유에선지 글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이질성에 대한 찬탄과 애증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타국인 듯 타국아닌 한국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객관적이라면 객관적인 시선에서 한국사회의 정신문화에 대한 고찰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대립구도라는 환경적 요인과 저자의 통렬하다시피한 비판을 상기한다면, 한국사회에 대한 일종의 폭로이자 고발이라 할만큼, 비판적 성격이 농후한 글이다. 일본이라면 거품물고 달려드는 폐쇄적 민족주의자에게는 이런 글은 일본에 대한 분노를 적립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리라. 그들은 아마 일본의 도덕성을 거론하며, 혹은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이러한 논변에 대해 반박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점,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이 책에서 저자가 예리하게 후벼파는 그 지점이라는 것을 아마 그들은 의도적으로 혹은 무지하게 외면하리라. 폐쇄적 민족주의에 대하여 우려를 감출 수 없는 입장에서도 이 책은 때때로 어떤 거북한 느낌이 유발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기만적인 이중성을 고발한다. 그것에 대한 긍정적인 분석도 설득력이 충분하지만 더욱 뼈아프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역시 그 이중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다. 저자는 한사코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며 조심스럽게 주장하는 듯 하지만, 거기에는 예리한 날이 서려있다.

저자는 글에서 '도덕적'과 '도덕지향적'을 구분하고 한국을 도덕적이 아닌 도덕지향적인 사회로 분류있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이 글의 백미이자 핵심이다.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도덕을 추구하지만 결코 도덕적이지 않으며, 도덕지향에서 도덕과 단절되는 사회다. 언제나 도덕지향을 추구할 뿐 도덕적이도 않고, 실상 도덕에는 관심이 없다. 서로가 각각의 도덕을 뽐내기 위해서 상대방의 도덕을 공격하는, 도덕이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한 도덕지향적 사회. 그렇지만 정작 공격하는 이도 반격하는 이도 그 누구에게도 도덕이 없는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사회. 저자는 한국사회의 어떠한 대립적 양상들, 혹은 충돌의 양상들이 결국 하나의 장(場)으로 수렴된다고 말한다. '누가 도덕적인가?' 결국 한국사회에서의 성공은 도덕투쟁에서의 승리다. 도덕 없는 도덕투쟁에서의 승리. 누가 더 도덕적인 '척'을 잘하느냐가 한국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인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통찰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찰과 반성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을 상기해보자. 검은쥐든 흰쥐든 고양이만 잘잡으면 된다지만, 한국에서는 고양이가 쥐를 잘 잡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그 목적에 부합하는 자신의 능력들, 예컨대 운동신경이라든지 민첩함이라든지를 증명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도덕성을 증명해야만 한다. 얼마나 착한지, 얼마나 선한지, 얼마나 올바른지가 쥐를 잘잡는 것보다 중요하다.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 기준에 의존한다는 것은 철저히 외면당한다. 내로남불이라는 키워드는 한국사회에 대한 저자의 통찰과 궤를 같이한다. 내로남불일 수 있다. 또한 내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서, 상대방의 불륜을 지적할 권리와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도 아니다. 법을 한치의 오차와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준수하는 준법적인 사람만이 법을 위반하는 위법적인 사람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로남불이라는 키워드가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것에는 다름아닌 '인정의 결여'에 있다. 자신이 로맨스라 주장하고 상대방은 불륜이라 주장하는 자는 자신의 귀를 막고 상대방의 입을 막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아무런 결점도 결함도 잘못도 없다. 상대방만이 오직 악의 축이요 화신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사과하고 고백하는 순간 그는 패배자가 된다. 이 파멸적인 도덕투쟁과 그에 열광하는 군중들이 바로 내로남불을 만드는 환경적 요인이라면 요인일 것이다. 사과도 고백도 없기에 반성도 용서도 성찰도 없다. 오직 상대방의 '부도덕'을 공격하고 자신의 '부도덕'을 은폐하는 것이 도덕투쟁, 아니 도덕지항적 투쟁에서의 승리의 정석이다. 이 투쟁장에서 내로남불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다.

몇 년 전, 선후배 사이의 연예인 두명이 반말과 욕설을 주고받은 것으로 온종일 한국의 온라인이 도배되다시피 한 적이 있다. 거기서 목격한 한국사회의 집단적 광기야말로 한국이 얼마나 자폐적인 도덕지향주의에 찌들어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례다. 목적은 하나다. 누가 도덕이고 누가 부도덕인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누가 정의이고 누가 불의인가? 게다가 목적은 이미 정해져있다. 사실과 당위에서 규범이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규범은 이미 정해져있고 그 규범에서 사실과 당위가 우악스럽게 끼워맞춰진다. 상황, 맥락, 정황, 내용 등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그 규범에만 충족, 혹은 미달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선후배의 우발적이고 감정적인 대립에서 발생한 충돌에서 온갖 논리들이 샘솟는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일상생활에서의 대립과 충돌이라는 삶의 양식은 무한정으로 비약한다. 이제 그들은 심판자가 되어 저울과 자를 들고 그들의 도덕성을 측량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의 일상생활이 자로 잴수 있고, 저울로 측정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심판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누가 이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다만 바라건대, 이제 좀 솔직해지자. 

이 도덕투쟁장에서는 모든 장면들이 드라마나 영화와 같이 시퀸스로 처리된다. 일상생활의 지지부단한 복잡성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미묘함과 상황의 돌발성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 장면이 바로 도덕투쟁장의 무대다. 그 사람이 살아온 총체적인 모든 것은 결국 그 장면으로 환원된다. 관객들은 단지 장면을 원할 뿐이다. 설명 가능한 장면을,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장면을 원한다. 그 장면에서 나쁜놈은 온 삶이 나쁜삶이 된다. 그 전의 장면과 그 후의 장면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장면의 논리가 한국식 도덕투쟁의 바탕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한국은 변덕이 심하다. 이 장면에서 모든 평가를 끝냈다가도 다시 저 장면에서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린다. 왜? 보이는 것이 전부니까. 한국사회의 집단적 성격 중 부정적 요인으로 인식되는 냄비근성도 바로 이 도덕투쟁에서 연유한다. 왜? 안 보이면 끝이니까. 그러나 실상 그것이 보이느냐 안보이냐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는 것이 도덕투쟁에서의 도덕평가와 도덕판단이라는 공격을 가능케하니 그런 것일 뿐이다. 한국사회는 상대방을 평가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평가를 회피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도덕투쟁을 지탱하는 모든 논리들은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다. 가장 이성적인 논리는 그런 일에 죽자고 열올리면서 신경쓰지말고 네 앞길이나 신경쓰라고 말하는 논리야말로 여러모로 백번천번 생각해봐도 가장 이성적인 논리다. 도덕투쟁의 논리는 전형적인 한국식 도덕지향적인 논리인 답정너식 논리다. 답은 정해져있다. 이유와 변명은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그 어떤 이유와 변명도 한국사회에서는 결코 도덕이라는 목적을 극복하지 못한다. 한치의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가해자를, 그렇기에 끊임없이 피해자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둘 모두를 양산한다. 선을 만들기 위해서 악을 만들어낸다. 그 연예인 선후배들의 충돌에 한국 사회가 들썩인 것은 단지 그들이 연예인이라는 화제성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과연 그뿐일까? 한국의 SNS는 이런 도덕투쟁이 전이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차마 실생활에서 상대방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기에 도덕적으로 서로의 사생활을 염탐한다. 그리고 그 사생활에 어떤 부도덕적인 측면을 감지하면 또다시 어김없이 도덕투쟁의 장이 한바탕 펼쳐진다. 옳고 그름을 재판하는 판관들과 온라인 도덕군자와 사이버 공자맹자가 급습한다.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보호되길 원하지만 상대방의 사생활은 가감없이 노출되길 원한다. 자신의 부정은 숨기고 은폐하여야하고 상대방의 부정은 파헤치고 적발해야만 하는 도덕투쟁의 생존법칙이 한국사회의 어떤 사고적 습관에 뿌리 깊게 관여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에서 개인은 아직도 갈길이 멀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도덕투쟁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기 때문이다. 집단에 의존하지 않고 도덕투쟁에서 빗발치는 공격들을 감당해내기란 처참할 정도로 곤혹스럽다. 집단은 가장 안전한 은신처다. 그리고 이제 개인은 때때로 이 집단에 속해서 공격자가 되기도 한다. 거기서 승리하면 개인으로는 맛볼 수 없는 한국식 도덕투쟁에서의 승리가 주는 쾌감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모든 요소들이 개인을 떼로, 집단으로, 조직으로 몰아부친다. 도덕투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개인의 자리는 협소해진다. 이런 모든 도덕투쟁이 유발하는 역설적인 경고는 이제 단순히 사회문화적이고 군중심리학적인 범주에서만 속해있지 않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창의성과 자율성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전의 시대가 그것을 단순한 기호로 취급했다면 이제는 정말 그것이 없으면 불가한 시대로 도입한 것이다. 한국이 처한 여러 위기 중 가장 심각하게 인식해야할 위기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정신문화적 모순이다. 한 사회의 정신이야말로 그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표식이다. 이제 근면함과 손재주로만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도덕으로 먹고사는 시대는 이제 우리가 끝내야한다. 

한국사회가 많은 위기와 도전에 직면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제 바야흐로 한국에서도 '혼자의 시대'가 태동한다는 것이다. 구시대의 집단낭만주의에 젖어 현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자폐적 도덕지향주의자들과 유물론적 시각의 해석자들은 마치 혼자의 시대가 불우한 그 무엇처럼, 현대 자본주의의 처참한 인간소외의 한 양태처럼, 혹은 지양해야할 그 무엇처럼 취급하고 있지만 바로 그점이 그들이 자폐적인 이유다. 혼자의 시대야말로 한국사회의 역사에서 유래없는 정신적 혁명의 시기이자 비로소 한국 정신의 근대화를 개막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지 말았어야 할 시기가 아니라', '너무 늦게온 시기다.' 경제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든 그 어떤 무엇이든 '혼자' 그 자체는 결코 고립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한한 가능성에 가장 심각한 치명타를 입히는 것도 바로 한국사회의 도덕지향주의다. 한국사회에서는 상술했듯이, 고백도, 인정도, 사과도, 용서도 없는 무한도덕투쟁이 전개되기에 개인과 개인간의 진실한 유대관계조차도 쉽사리 전개될 수 없다.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그리고 그 다른 한편의 족쇄는 상대방에게 채우며 서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평가하는 도덕투쟁의 축소판이 전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또 다시 개인들은 집단과 떼로 숨어들 것이다. 결국 이 도덕지향주의의 족쇄를 끊어내고 도덕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것만이 한국사회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총체적 해법이다. 내 발목에 메인 족쇄를 풀지 않으면 내 옆의 누군가의 족쇄도 풀리지 않는다. 이제 옳고 그름과 도덕평가라는 허상은 잠시라는 이름으로 무한히 유보하자.

개빠에 관한 니체적 소고

[중략] 그들은 잠시 자신들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서 그들 주위의 비참함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개를, 다른 자는 친구를, 세 번째 인간은 여성을, 네 번째 인간은 당파를, 다섯 번째 인간은 매우 드문 자이지만 시대 전체를 필요로 한다. - 니체

개식용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첨예한 대립을 보면서 새삼 니체의 저 찬란한 통찰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니체는 개빠의 본질을 백년 전에 미리 꿰뚫어 본 것일 수도 있으리라. 위의 통찰은 다른 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길 원하는 존재이고, 자신의 그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존재의 비참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이 비참함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 이것 또한 일종의 힘에의 의지다. 이 지점을 조금 더 분석해보자면, 니체는 이 세계가 바로 이 힘에의 의지로 가득 채워져있고, 인간은 힘에의 의지 그 자체라고 분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아포리즘에 나오는 비참함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도 일종의 힘에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이 힘에의 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즉 문구에 열거된 대상들의 비참함을 이용하여 힘에의 의지를 표출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수단이 바로 다름 아닌 '개'다. 한창 책을 읽다가 이 문구를 보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개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니체의 찬란한 통찰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개만큼 편리하게 자신의 지배욕구를 해소할 수 있고, 복종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까?사람들이 개를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비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의 비참함의 이용하기 위함이다. 즉, 개를 키우는 것 또한 자신의 힘에의 의지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실 개빠들에게는 비참함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니체의 언어에서 극복이란 단어가 가지는 가치는 실로 궁극적인 것이어서 노예들에게 사용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개빠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개의 비참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함을 은폐하기 위해서 개의 비참함을 이용한다. 개빠들이 끔찍한 이유다. 

양심있는 이들을 보라. 그들은 개를 키우면서도 늘 스스로에게 즉,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에, 자신이 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개가 존재하며, 그런 자신이 개를 이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겸허하게 인정하고 수용한다. 그들이 진정 자신을 알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하며 자신의 책임을 자신이 기꺼이 짊어지는 이들이다. 그들은 수치심과 부끄럼움을 알기 때문에 개빠들이 지껄이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흔히 양심이 있다고 말한다. 양심은 바로 이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이것은 동시에 이들이 바로 니체가 말한 주인의 도덕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주인을 향한 힘에의 의지, 주인을 갈망하는 힘에의 의지, 진정한 힘에의 의지, 즉 주인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다.

개를 위하여! 개빠들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개를 키우면서 항상 이런 개소리를 해댄다. 개를 위해서 개를 키운다는 개소리는 이제 제발 좀 그만 집어치워라. 생명존중이니 동물권이니 가족 같은 반려견이니, 인간과 가장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특별한 동물이니 어쩌고 저쩌고 말 같지도 않은 미사어구들을 덕지덕지 붙이지만 그것은 다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솔직하지 못한, 아주 비겁하기 짝이 없는 행태인 것이다. 자신들이 개를 억압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양심의 가책과 그에 수반되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하여 더더욱 목에 힙을 주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그 악순환을 반복하는 자폐적인 정신착란증세, 이것은 분명한 힘에의 의지이지만 병든, 노예적인 힘에의 의지다. 나약한 이들이 가지는 나약한 힘에의 의지인 것이다.

목줄을 채우고, 때론 매를 들고. 그저 먹이만 제때에 몇 번 챙겨주면 개만큼 순종적인 짐승이 더 있을까? 사람보다 개가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그 비참함과 두려움, 공포를 보라. 그들은 사람이 두려워 짐승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자신의 추함, 악함, 비겁함, 무책임하고 게으르고 나태함과 같은 모습을 폭로하지도 고발하지도 않는, 그저 자신을 위해서 꼬리를 흔들어주는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개 한마리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타인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회피이다. 그들은 자신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니체는 그런 힘에의 의지를 통해서 표출된 것을 노예도덕이라고 불렀다. 개빠들은 개의 노예인 것이다.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온갖 핑계를 대면 자기 자신을 은폐하는 그런 모습은 개의 뒤에 숨어서 자신의 추잡함을 은폐하는 바로 오늘날 개빠들의 모습은, 모든 것을 긍정했지만 동시에 서구 사회에 만연한 모든 노예도덕을 경멸했던 니체에게는 아마 참기 힘든 모욕이지 않을까.

니체가 당시의 서구 사회와 그에 만연한 문화적 조류, 인간상을 깨부쉈던 점을 감안하면, 니체도 개에게 애착을 쏟는 서양인들의 모습은 딱히 달히 달갑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을 유비해본다. 그냥 개 키우는 사람들에게도 그럴진대,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게 아니라 더 나아가 개는 애완견이 아니라 반려견이고 개는 인간과 동등한 인격체니 가족이니 지껄여대는 개빠들을 보면 아마 니체가 식겁을 금치 못했을 것 같다. 이렇게 보자면 서구 사회와 그리고 국내의 개빠들이 그렇게 추앙해 마지 않는 개를 대하는 일련의 서구적 문화는 딱히 고결할 것도 없이 오히려 지독하게 모순적인 자가당착인 것이다. 자신들의 지배욕과 복종과 억압에 대한 욕망을 개를 통해서 해소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온갖 미사어구와 고결한 정신으로 위장해서 은폐하여, 자신이 무슨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싸우는 투사이자 순례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일련의 의식 구조가 개빠들에게 잠재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개빠들의 행위, 고래고래 악을 써대며 자유를 강탈하는 강도와 같은 행위를 분명 니체는 긍정할 것이다. 그것이 분명 노예와 강도와 같은 것이긴 하지만 힘에의 의지는 의지이니까. 마찬가지로 강도짓을 할 자유도 자유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니체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자 열망했던 인간이었기에 저 말 같지도 않은 개빠들의 행위도 인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니체는 모든 것을 긍정하면서도 노예와 같은 것은 경멸했기에, 아마 니체는 개빠들의 행위의 근거가 되는 주장에는 코웃음을 치며 조소하지 않았을까 싶다. 생명존중이니 동물권이니 인간과 개의 역사적 친밀함이니 하는 주장들 말이다. 아마 니체라면 개빠들이 좀 솔직해지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자신들이 개에게 해소한 욕구와 감정을 자기기만으로 포장하여 이제는 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개를 먹는 사람들까지 지배하고 억압하고 싶은 욕구와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안될까. 물론 그럴 정도의 양심이 있었다면 애초에 개빠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나도 다만 그들이 정말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개를 먹지 말라는 그 주장은 분명 강도와 같은 주장이지만 강도짓을 할 자유가 있듯이 그것은 개입하고 통제할 순 없다. 그러나 그런 강도짓을 할 때에 이유는, 변명은, 좀 이유 같은 이유와 변명 같은 변명을 대줬으면 하는 것이다. 니들 개먹지마! 이유? 그냥 내 마음에 안들어! 그냥 복종해! 이렇게 말이다. 이 얼마나 한 점 모순과 거짓없는 진실인가. 물론 그렇게 진실을 말할 정도의 양심이 있었다면 강도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강도짓을 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강도짓을 해도 된다는, 강도짓은 옳다는 규범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은 정말 그걸 모를 정도로 무지한가. 그들을 보면 지성과 양심은 비례한다는 나의 철칙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솔직하게 말해도 그들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니체는 흔히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로 인식된다. 그런데 그 포스트모던의 물결이 몰고온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니체가 가장 혐오하고 경멸해 마지 않았을 PC들이다. 개식용 금지를 강요하면서 자유를 강탈하는 개빠들도 결국 PC라는 강도때의 한 무리라고 생각한다. 이러다 도대체 할 수 있는게 뭐가 남을까. PC들은 이렇게 자유를 서서히 점령하며 약탈하는 것이다. 강도짓을 할 자유보다 고귀한 것, 진정 니체가 찬미했던 고결한 주인의 도덕, 힘에의 의지는 강도짓을 할 자유와 의지가 아니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런 강도와 맞서 싸우는 자유와 의지였으리라. 니체는 자신이 너무 빨리 태어났다고 훗날 다시 오겠노라고 말했다. 그랬던 니체가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온다면 과연 뭐라 할 것인가. 아마 아직도 너무 빠르다고, 자신이 너무 빨리 왔다고 말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철학자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니체를 꼽을 것이다. 시대와 인간이 가장 병들었을 때, 그때가 바로 니체가 등장할 때니까.

축제와 일상

그것이 기획납북인지 아니면 그저 기획탈북인지는 민변이 제기한 혐의를 토대로 법적 절차를 밟아 규명하면 될 일이다. 의혹이 제기된지 불과 하루만에 이렇게도 신속하게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것을 보면 이례적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민변과 검찰이 내밀한 공조를 통해 이미 말을 맞추고 각본을 다 짜놨다는 의구심이 든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과거 정권의 적폐청산이라는 측면과 판문점회담으로 북한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고조된 이 시국에 대통령의 친정인 민변이 이런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정부가 민변에게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이번 기획탈북 내지 기획납북은 이번 정권의 입맛에 안성맞춤인 사안이란 것이다.

그 저변에 깔린 공조와 의도는 설령 그렇게 추측할 수 있을지라도 이번 사건의 본질을 덮을 순 없다.만약 국정원 주도의 선거대비용 기획탈북이라면 국정원은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는 마땅한 책임이 있다. 그 여파는 다시 한 번 적폐청산이라는 명목의 국정원 개혁의 후반전 신호탄이 될만큼 막강할 수 밖에 없다. 댓글공작 사건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을 수 없다. 추후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국정원의 기획탈북으로 밝혀지면 국정원 개혁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고, 그 고함을 동력으로 정권은 국정원을 수술대에 눕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국정원의 도덕성이 추락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바로 국정원 자체가 자신이 수술대에 누워야하는 환자라는 것을 입증한 것이기에 개혁을 자초한 꼴이 된다. 이번 사안에서 국정원의 책임이 어느정도냐에 따라서 국정원이 받게될 공격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정도의 강도냐를 떠나서 그 자체로 이미 국정원개혁론자들은 아주 유용하며 매우 든든한 또 하나의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이 사안이 정말 정치적 목적의 '기획탈북'으로 판명된다면? 국정원개혁반대론자들에게 치명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기획탈북'을 넘어 탈북자 당사자들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와 강요가 동반된 '납치적 탈북'이라면? 국정원은 자신 스스로가 배를 가르고 매스를 기다리며 수술대에 눕는 꼴이 된다. 국정원개혁반대자들에게는 최악의 치명타가 될 것이다. 반면, 국정원개혁론자들은 최상의 시나리오를 쥐게된다.

사실 여기까지는 추측과 예측이 뒤섞인 잡변에 불과할지 모른다. 개혁을 하든 말든 국정원 스스로가 자초한 것에서 그 책임을 회피해선 안되며 또한 회피할 수도 없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 관심이 가는 것은 이런저런 정치적 이해와 그 파장이 아니라 이 사안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 지 노심초사하며 벌벌 떨고 있을 탈북자,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납치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부르짖는 탈북자 송환의 서슬퍼런 고함소리 그 한복판 어디에서도 이들의 의사를 담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누가 납치범인지 알 도리가 없다.

납치를 생각해본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야 할 것은 결국 당사자의 의사다. 당사자가 피해자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또한, 그것이 납치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또한 그들에 의사에 의한 것이니까. 유괴도 일종의 납치라면 납치일 것이다. 속이고 기만해서 의사와 반하는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유괴라고 한다면 말이다. 가정폭력으로 학대받고 고통받는 아이를 집에서 '구조'했을 때, 부모 곁에 머물고 싶어하는 아이의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동기를 명분으로 그 아이를 다시 그 가정으로 돌려보내자고 말한다면 그 말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까? 학습된 폭력과 각인된 고통이 진정으로 끔찍한 것은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피해자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도망쳤다는 이유 다시 폭력의 이유가 되는 것이 두려워 역설적으로 그 폭력 안에 머물고자 한다. 결국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말하는 자들은 그런 폭력의 구조를 외면하고 학대를 묵인하고 방치하는 것 아닌가. 정말 끔찍하고 위험한 폭력은 그 피해당사자가 감히 신고와 탈출을 도모하지 못 할 정도로 위압적이다. 그런 상태에 처한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그 학대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 그것을 발견하고 꺼내줘야만 한다. 구조와 유괴는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지금 사안의 당사자들이 아이는 아닐 것이다. 그들을 자신의 의사가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말하지 못하는 미숙한 어린아이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과연 판단력이 올바르게 발현될 수 있을만큼의 여유로운 상황일까? 그들은 자신의 목숨과 앞으로의 인생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작금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다가올 운명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형국이 됐다. 나는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유괴한 것인지, 도대체 누가 유괴범인지 혼란스럽다. 나는 단지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미숙아가 아니다.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해줘야하고 그들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고향으로의 귀환이든 대한민국에서의 삶의 지속이든. 그것만이 무엇이 구조인지 유괴인지 누가 유괴범이고 누가 구조원인지를 밝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지금의 상황은 그들을 납치하고 있다. 그들이 납치됐다며 돌려보내야 된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자들이 그들을 유괴하고 있다. 그들은 입이 막히고 발이 묶였다. 그들을 구조해야한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제부터 우리가 절차적 정당성을 그렇게 중시했는지. 절차적 정당성이 정말 중요하다면, 그것이 위반됐기에 그들이 북송되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면 나는 그런 말들을 하는 자들이 왜 북한의 절차적 정당성은 문제를 삼지 않는지 나는 아리송하기만하다. 나는 북한이 어떤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남침했는지, 어떤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연평도를 포격하고 철책을 넘어 지뢰를 설치했는지, 어떤 절차적 정당성을 가지고 천안함을 격침시켰는지, 어떤 합의와 과정을 준수하며 수차례의 핵실험을 진행했던 것인지, 도대체 어떤 절차적 정당성으로 정권 차원에서 인민들을 굶기고 고문하고 학대하고 감시하며, 사찰하고 통제하는지 나는 도대체 어떤 정당성이 그것들을 정당하다고 말 할 수 있게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이번 사건에서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르짖는 이들이 왜 그동안은 북한정권의 그 절차적 부당함에 대해 침묵했는지 알 길이 없다. 만일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북한은 대한민국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니 물타기하지 말고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자행한 절차적 부당함에 집중하라고 말한다면? 전자는 가정폭력과 학대범에 다름없고, 후자는 그것을 방기하고 방조하는 공범에 다름없다. 나는 민변이라는 단체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라는 정식이름을 가진 단체라고 알고 있는데 만일 이들이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며 탈북자들의 북송을 주장한다면 그들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양심에 의거하여 민주라는 단어를 단체이름에서 삭제해야 한다. 그들이 만약 그런 논리를 펼친다면 그들이 그토록 부정하고 증오하는 과거의 군사정권이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정확히 부합하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다름아닌 대한민국의 민주정권이기 때문이다. 민변이 언제부터 군사정권을 인정하고 용서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만 그들이 솔직해지길 바랄 뿐이다. 나는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데 도대체 어떤 절차적 정당성이 필요하다는 것인지가 알고 싶을 따름이다.

축제는 찬란하다. 거기서는 모두가 화려하게 빛난다. 옷장 깊숙히 보관해둔 좋은 옷을 꺼내 먼지를 탈탈 털어 입는다. 눈부신 조명 아래서 농담과 찬사와 감탄을 주고받으며 이 축제가 영원하리라는 환상에 전율하며 더욱 그 축제에 빠져든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축제는 반드시 끝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일상의 일탈이 다름아닌 축제다. 축제는 잠시고 일상은 지속이다. 실상은 반짝이는 조명과 화려한 옷들과 윤기가 흐르는 음식들 사이에서 찾을 수 없다. 실상은 일상에서 드러난다. 축축하고, 음침하고, 지루하고 피곤한 연속과 반복에서 실상은 발견된다.

세계의 인권기구들이 한목소리로 북한의 실상을 고발한다. 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강제노역과 성고문을 비롯한 각종 고문에 시달린다. 그곳에서 공개처형은 일상이다. 그러나 어디 정치범 수용소에서 뿐만인가. 수용소 담을 넘으면 빈곤과 굶주림이 도사린다. 감시와 통제는 북한 인민들의 일상 그 자체가 된지 오래다. 그것이 바로 북한의 실상이다. 그런데 축제의 분위기에 편승해 그들을 그 지옥같은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나는 이것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들의 의사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의사를 들어주고 존중해야한다. 그건 분명하다. 그들은 미숙아가 아니니까. 그러나 설령 그것이 자명하다 할 지라도 가슴 속 한켠에 남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불쾌감과 불안감은 무엇인가. 그들이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정말 그들을 놓아줘야 하는지... 그들이 돌아갈 곳이 어떤 곳인지 그들 또한 모를리 없겠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인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한 그들이 처한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이 마음이 그저 한탄스럽기만 하다. 나는 다만 그들이 승리하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밤잠 설칠 일 없도록

박정희 정권 초 맺어진 한일협정은 분명 굴욕적인 면이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 역사가 일제 치하에서 당한 고통에 상응하는 물질적 댓가가 지급되었느냐는 문제는 별개로 둔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그 협정에는 사과가 없었다. 사과는 테이블 위에 올려지지도 못했고 애초에 그 협정 자체의 목적에도 그다지 중요하게 논의되지 못한 안건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자행된 만행들은 정권 차원의 정치적 필요성 앞에서 묵살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굴욕적협정을 맺었다는 시민사회의 분노와 그에 말미암은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다.대학생들은 상여를 메고 곡을 하며 박정희 정권이 주창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뤘다. 바로 한일협정 반대투쟁이다. 이 저항은 박정희 정권이 출범 후 맞이하게 된 가장 큰 저항이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이 강경권위주의 노선으로 선회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박정희 정권에겐 치명적인 위기감을 초래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런 결함과 맹점이 있을지라도 박정희 정권이 추구했던 정치적 필요성 자체가 무시될 수는 없다. 완벽한 협정은 없다. 한일협정은 분명 굴욕적이었지만 그 협정이 필요했던 동기와 그로인해 얻어낸 댓가,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구어낸 결과물은 마땅히 그에 응당한 이해와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김정은이 분단의 경계를 넘어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무르익는 평화의 분위기는 분명 어떤 뭉클함과 낙관으로 채워진 희망을 고무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러한 낙관과 희망이 토가 쏠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증스러운 것은 무엇때문인가? 김정은은 대한민국 대통령과 마주앉아 이제 밤잠 설칠 일 없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 자신들이 벌인 행동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불안하게 하고 위협했는지를 뻔뻔스럽게도 웃으며 인정한 것이다. 모르겠다, 뒤에서도 아니고 마주앉은 그 앞에서 그렇게 웃으면서 말할 일인지. 종 잡을 수 없는 기습도발로 무수한 희생자가 나왔다. 우리는 얼마나 맞았던가. 무단침입으로 해상에서 두차례의 해전을 치뤘고, 자국의 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함선을 격침시켰다. 총 한번 못 쏴보고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국민이 차디찬 바다에 수장됐다. 민간인이 거주하는 섬을 폭격하고 군인을 비롯한 민간인이 사망했다. 섬은 불길에 휩싸였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떨어질 지 모르는 포탄과 폭격이 내리꽂은 그 어마어마한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들이 살던 터전은 포탄의 상흔을 흉터로 간직하게 되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봉합되지 않은 상처를 부여잡고 숨죽여 울었다. 그들은 철책을 넘어 목함지뢰를 설치했다. 그곳은 우리 군인들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반드시 거치는 지점이었고 그들 또한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군인은 그 지뢰로 인해 발목이 절단됐고 눈앞에서 전우의 몸이 공중분해되는 것을 평생의 기억으로 떠안게되었다. 김정은 통치의 정당성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김정은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도 그만큼 거슬러 올라가 확장되어야 한다. 칼기폭파와 버마테러 만행의 책임에서도 그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모든 만행에 아스러진 희생자와 그 가족의 고통은 아직까지도 지울 수 없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이다. 늘상 이런식이었다. 그들은 때리고 윽박질렀고 우리는 맞고 참았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실실 웃으면서 어떠한 사과도 없이 그저 '이제 안 때릴게'라며 말한 것이다. 그말을 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따라 웃었다. 모를 일이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 역겨운 오만과 무책임의 여유가 뒤범벅된 말에 분노를 억누르며 회담의 성공을 위해 지었던 웃음인지, 아니면 그 말 자체에 대한 흡족함과 역사적 장면을 연출해냈다는 성취감에 그저 그냥 웃었던 것인지.

우리가 그렇게 맞으면서도 참았던 것은 바보병신이어서가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 의지를 가지고 행한 인내였다는 것을 설명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히 설명되었는지 의문이다. 혹여 이런 의문이 지금의 단계에서는 너무나 성급한 것이며 추후에 반드시 관철될 것이라며 낙관을 유지하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좋다. 그것은 앞으로의 결과가 말해줄 것이기에 기다릴 수 있다. 그동안 해왔던 인내에 비해 앞으로 펼쳐질 상황들에 대한 인내는 그나마 더 분명하게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테니까 조금 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협상테이블에 그들의 만행에 대한 사과와 우리의 인내에 대한 그들의 책임있는 조치가 애초에 안건 자체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사과를 받아낼 의지 자체가 애초에 포기되었다면? '사과를 받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대의를 위해 억울하지만 꾸역꾸역 참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며 지나간 일을 왜 들추냐며 좋은게 좋은거니 다잊자'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러한 염려가 기우이기를 바란다. 당사자 쌍방이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협정이란 없다는 말이 모든 협정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순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또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진리를 함축하는 말이지만 그말이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비가오나 눈이오나 집회를 연다. 응어리진 고통과 한을 부여잡고 일제의 만행을 증언한다. 일제에 의해 위안부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어떤 필요와 목적에 의해서 행해졌을지라도, 어떤 시대적 상황이 고려될지라도 위안부라는 야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다. 만약 북한이 대한민국에 자행한 만행을 그저 '분단되어 있는 대치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비극' 정도로만 유야무야 어거지로 넘어가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또 다른 연평해전 할아버지 할머니를, 연평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천안함 할머니 할아버지를, 목함지뢰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리그 그 모두를 비롯한 수많은 사과받지 못한 희생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민족이 자행한 만행에 대해서 사과를 받지 못하고 넘어간 것에 대해서 굴욕이라 한다면 한민족이 한민족에게 자행한 만행은 도대체 얼마나 큰 만행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모든 살인과 살해가 반인륜적 속성이 내재되어있겠지만 존속살해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 할 수 있기에 통상의 살해와 따로 분류하여 더욱 엄중히 책임을 묻는다. 이것이 우리 법에도 반영되고 구현되는 정신이다. 북한의 만행에 대해서 사과받지 못한다면, 정말로 그런 굴욕적 남북협정이 체결된다면, 이번에는 상여를 메고 곡을 부르며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이 아니라 민족의 장례식을 치뤄야 될지도 모른다. 한민족이 한민족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 일관되게 침묵하는, 그저 민족을 정쟁의 수단으로 들먹이는 외눈박이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진정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가 우리 사회에 있다면 말이다. 민족주의가 애당초 있을 수는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있더라도 민족을 위한다면서 그 민족을 죽이는 짓에 침묵하는 민족주의자를 원체 많이 봐와서인지 그런 일은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애당초 '진심어린' 사과는 바라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바랄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진심을 증명하고 측정할 수 있단 말인가.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에 대한 인정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면 된다. 그에 합당한 배상의 문제는 그 후의 문제다. 형식적일지라도 상관없다. 사과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정하고 사과하라' 딱 이것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정과 사과조차 일본과 북한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북한이 자행한 만행이 어떠한 측면에서 일제가 자행한 만행에 비해 '덜'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인정과 사과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안부를 외면하는 일본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어질 협정이 사과할 의지, 사과를 받아낼 의지조차 없는 굴욕적 평화협정이라면 우리는 훗날 '평화로운 한반도'의 거리에서 천안함, 연평해전, 연평도, 목함지뢰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집회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광경이 우리가 원하는 평화일리 없다.

김정은은 북한으로 관광 온 관광객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사상자가 나오자 "그 어떤 말과 위로나 보상으로도 가실 수 없는 아픔을 준데 대해 깊이 속죄한다"고 했다. 김정은이 속죄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개연성이라고는 그저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일어났을 뿐인 단순 교통사고에 대해서도 그렇게 반응할 정도로 예민한 책임의식을 가졌다는데에 두 번 놀랐으며, 교통사고에도 그런 표현을 써가며 사죄했으면서 기습적이고 의도적인 군사도발로 자신들 그렇게 부르짖는 '우리민족'인 우리 국민을 죽인 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나 없고 웃으며 퉁치고 넘어가려는 대범함에 세 번 놀랐다. 그 교통사고의 사상자 중에 마오쩌둥의 친손자가 있었다느니, 중국 내 유력단체가 피해를 입었다느니는 중요하지 않다. 마오쩌둥 친손자든 외손자든 증손자든지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관광객에게도 책임감을 느끼며 '속죄'한다고 까지 말하면서 비겁한 기습도발로 무고한 민간인과 군인을 살해한 것에는 어떤 속죄도 없다는 것에 깊은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둥의 친손자라는 이유가 산화한 우리의 아들 딸과 아버지 어머니며 형제 자매가 받지 못한 속죄를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 못할 일이다. 정전상태의 적국을 타격한 것이 뭐가 문제라고 한다면 지금으로서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 그 논리대로라면 정전이 종전으로 전환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북한은 마땅히 생존해있는 시대의 고통에 응분의 책임과 사과를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그럴까? 아니 애초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평화일까? 그들이 자신의 만행에 대하여 사과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평화에 얼마만큼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이제 정부의 역할이 막중하다.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며 실효가 있다. 그들에게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또 평화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도망갈 것이다. 그들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족쇄를 채우는 일이다.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사과 없는 평화란 한쪽이 철저하게 파멸해야지만 가능하다. 화해 없이 맞이한 평화는 재앙의 씨앗을 품고 있다. 어렵사리 문을 열고 그들을 테이블에 앉힌 것은 분명 성과다. 그러나 거기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얻어맞고 주머니만 털리고 나올지는 지켜볼 문제다. 부디 정부가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고 나오길 비란다. 가장 극악한 만행은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분명히 각인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인정없고 사과없는 만행만큼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고, 사과 없인 평화 없다는 분명한 압박을 가해야한다. 그들이 사과하지 않겠다면 그들의 뒷목을 잡아 끌고와서라도, 무릎 관절을 후려쳐서라도 그들을 현충탑 워령비에 무릎 꿇려야 한다. 이는 정부의 역할이며 이번 평화협정에서 비핵화보다도 중요한 문제다. 비핵화는 다시 핵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그들이 인정하고 사과한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진실로 영원히 남을 것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아직도 밤잠을 설치며 맴돌고 있는 모든 이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게하는 유일한 길이다. 김정은이 했던 밤잠 설치지 않게 하겠다고 한 이 약속은 어쩌면 북한의 만행에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과 산화한 용사의 영령들에게 우리가 먼저 했어야 했던 약속일지 모른다.

결국 제재와 압박

트럼프와 김정은이라는 양극단에서 문재인이 적절한 중재자로서 역할한 부분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럼프가 여지껏 어떤 역대 미국 대통령보다 강경한 대북입장을 표명하는 대통령인 점은 문재인에게는 역설적이게도 행운으로 작용한 면이 있다. 한국의 상대가 트럼프 못지 않은 김정은인 점에서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트럼프가 온건한 입장으로 접근했다면, 혹은 그 전임 대통령과 같이 대북문제에 이정도의 열성으로 집중하지 않았다면 문재인이 아무리 채찍을 들었어도 북한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채찍을 들 마음이 있었는지도 불투명하겠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나타나는 외교적 감각은 확실히 노무현의 오류와 패착을 자신들이 스스로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문재인 정부는 집권 2년차의 외교성적표'만'으로는 이미 노무현 정부를 뛰어넘었다고 평가한다. 지금까지는. 하긴 노무현의 성적표가 워낙 마이너스 성적표라 문재인 정부가 어지간한 실책을 범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이러한 성과만 놓고 보더라도 노무현 성적표에 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트럼프와 문재인이 꽤나 좋은 케미의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트럼프가 영리하게 북한을 이용하고 관리했다면, 문재인은 이러한 트럼프를 영리하게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맞을 위기에 처한 사람은 때릴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에게 일단 화해의 의사표시를 전하기 마련이다. 민망하기도 하고, 결과가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궁지에 몰릴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적어도 대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문재인과 트럼프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평창동계올림픽부터 지금의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가 결과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결국 대북문제에 있어서는 제재와 압박이 필수적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트럼프가 방한했을 때 '전쟁가고 평화오라'는 현수막을 내걸며 극렬하고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민망하고 부끄러운 극성을 떨어대던 자들은 정말 그말이 자신들의 진심이라면 트럼프에게 사과와 동시에 감사를 표해야 함이 마땅하다. 평화를 부르짖던 자들은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고 느껴야한다. 무엇이 평화를 가져다주는지를. 무엇이 실체적인 실재로서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제발 그들에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는, 인간의 양심과 이성이란 것이 있기를 빈다. 그리고 아울러, 이러한 성과를 보고 이제 앞으로 장밋빛 로맨스만 펼쳐지리라 낙관하는 순진한 낙관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순진한 낙관론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속보로 북측의 일방적인 통보로 정상회담이 백지화됐다고 해도 놀랄 것이 없다. 그들은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더 절실한 반응은 이제 곧 평화가 오리라는 순진한 낙관보다는 아직까지도 갈 길이 멀다는 경계와 의심을 풀지 않는 냉철함이다. 그러한 반응이 주류를 이룰 때 정부도 북한도 모두 적당한 긴장감으로 협상에 임할 수 있다. 김정은이 본인 입으로 한국 국민의 대북인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코 뒷통수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점을 문재인 정부도 모르지 않으리라 희망한다. 

그동안의 대북문제에 있어서 굴욕적이라 여겨지던 부분들이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에 얼마만큼의 개연성을 가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는 대북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철저히 전략적인 자세로 굴욕마저 감내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셈이 됐다. 정말 실제로도 그러했었길, 그리고 그러하길 소망한다.

트럼프는 일국의 대통령,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대통령이다. 미치광이네 어쩌네 떠들고 호들갑 피우던 한국 언론과 일부 세력들은 트럼프에 대한 평가를 이번 기회에 재고해야한다. 이 현상이, 이 성과가 정말로 무엇이 근거가 되고 원인이 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지 무엇이 김정은을 협상테이블에 나오게 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분석하고 파악한 데이터야말로 향후 북한이라는 유사국가와 어떻게 협상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아주 유익한 지표가 된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귀중한 자산인 셈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을 때 그 사람이 밉고 원망스러우면 그 자리까지 폄하하고 만다.  대통령? 하, 그거 뭣도 아니네, 걔가 그걸 하는거 보면. 이런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밉고 원망스러워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사람이 괜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이나, 트럼프나. 뭐 어쩌면 김정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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